디오라의 역사인물 뒷이야기

친일파인가? 개혁가인가? 김옥균의 진짜 정체 본문

역사 인물의 이야기

친일파인가? 개혁가인가? 김옥균의 진짜 정체

디오라 2025. 8. 5. 20:27

 

조선을 개혁하려 한 남자, 김옥균의 삶과 죽음

1. 김옥균은 누구였는가?

1-1. 유학자에서 개화파로

김옥균(1851~1894)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정치인이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을 근대화하려 했던 개화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수재로 평가받았으며, 홍문관과 승문원 등을 거치며 빠르게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관심을 둔 것은 과거 시험의 영광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 개혁의 조선이었습니다. 그는 문과 무, 외교와 실무 모두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젊은 나이에 조정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2. 조선 후기의 시대적 배경

19세기 조선은 외세의 압력과 내부의 부패로 점점 몰락해가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삶은 피폐했고, 관료 기득권층은 개혁을 거부하며 제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김옥균은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실력 기반의 정치와 서구식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중국이 아닌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주목했고, 조선에도 비슷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는 교육 개혁과 경제 구조 개편을 통해 민중에게 실질적인 변화가 다가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1-3. 김옥균의 정치적 성장과 활동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 시기, 그는 외교와 군제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개화파의 리더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지만, 이것이 훗날 그의 '친일' 이미지로 연결되어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의 자강이었습니다. 김옥균은 외교적으로 능수능란한 면모를 보였으며,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서기 위해 어떤 국제 질서가 필요한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배경 위에 조선 말기의 인물 김옥균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배치한 이미지. 왼쪽에는 붓글씨 느낌의 굵은 흰색 글씨로 “김옥균”이 쓰여 있고, 이미지 아래에는 붉은색 강조 텍스트로 “조선의 개혁가 혹은 배신자?” 문구가 배치되어 있다. 인물의 단호한 표정과 어두운 분위기가 그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며,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구성

2. 갑신정변의 불꽃

2-1. 3일 천하의 시작과 끝

1884년 12월,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를 통해 개혁정책을 발표하고 구체제를 개편하려 했지만, 불과 3일 만에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쿠데타였고, 김옥균의 정치 생애를 바꾼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갑신정변을 통해 사회 구조 전체를 흔들려 했으며, 당시의 조선에는 너무나 급진적인 시도였습니다.

2-2. 개혁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었나

그가 주장한 개혁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 철폐, 내정 자주화, 근대 교육 확립 등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습니다. 왕권 강화보다는 국민 중심의 정치를 원했던 그는, 봉건 질서를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 변화는 조선 사회의 저항과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조선 왕실조차 그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신분제 해체는 보수적 양반계층에게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고, 개혁의 진입 장벽이 높았습니다.

2-3. 실패의 원인과 여파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청나라의 간섭과 조선 내부의 정치 기반 부족이었습니다. 일본의 소극적인 지원도 그를 배신하게 만들었고,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개화세력의 몰락을 초래했고, 이후 보수화와 청나라 의존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더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며, 개혁은 한동안 금기어가 되었습니다.

 

 

3. 망명과 배신, 조선에서 도망친 사나이

3-1. 일본 망명 생활

일본에서 김옥균은 정치망명자 신분으로 지내며, 계속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글을 쓰고 강연을 했습니다. 그는 국제 정세에 밝은 인물로 일본 지식인들과도 교류했으며, 조선의 비전과 미래를 놓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조선 내부에서는 그를 '망명자'에서 '매국노'로 보는 시선이 커져갔습니다. 그는 때로는 일본 정치계에서도 활용의 대상으로만 여겨졌고, 외교적 고립감도 커져갔습니다.

3-2. 조선에서의 여론과 배척

보수 세력과 민중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왕실을 위협한 인물로 비난받았고, 그의 정치적 재기는 완전히 막히게 됩니다. 친일파라는 오명은 그의 모든 활동을 음모로 해석하게 만들었고, 그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의도한 바와는 달리, 그의 행보는 왜곡되어 기록되었고, 역사에서 한동안 '반역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3-3. 김옥균의 고립과 방황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외로운 지식인으로 남게 됩니다. 일본에서도 점차 홀대받았으며, 정치적 고립은 그의 정신적 피로를 더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조선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고, 청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조선의 미래를 고민했고,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4. 암살, 그리고 역사 속의 재평가

4-1. 홍종우의 암살 사건

1894년 상하이에서 그는 조선 정부의 밀명을 받은 홍종우에게 암살당합니다. 등 뒤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그의 시신은 청나라에 의해 조선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극심한 능욕과 훼손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시신은 능욕된 후 조선의 거리 한복판에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개화파의 몰락을 상징하는 비극으로 남았습니다.

4-2. 청나라의 시신 능욕

청나라 측은 김옥균을 배신자로 간주하고, 그의 시신을 모욕하는 행위를 통해 개화 세력에 경고를 보냈습니다. 시신조차 정치 도구로 이용된 것이었고, 그의 죽음은 개화운동의 상징적인 종말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행위는 오히려 김옥균의 순교자적 이미지를 강화시켰습니다.

4-3. 김옥균에 대한 현대의 평가

오늘날 그는 선각자이자 조선 근대화의 상징으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비록 방법과 시기는 실패했지만, 그의 사상은 이후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역사 속의 오해를 넘어 다시 쓰여지고 있으며, 개혁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김옥균은 결국 실패한 개혁가가 아니라, 불완전했지만 치열했던 조선의 미래주의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5. 마무리

김옥균은 조선을 바꾸려다 조선에 의해 죽임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갔고, 그만큼 거세게 반발을 맞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옳았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변화란 무엇이며, 저항이란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를 배웁니다. 김옥균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조선의 비극이자, 한 사회가 외면한 진실입니다.